수용성과 수동성

수용은 기준 없는 순응이 아닙니다. 분명한 자신의 가치 기준과 삶의 지향이 분명할 때 우리는 주체적 선택이 가능하게 되고, 비로소 삶을 수용할수 있게 됩니다.

일상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모든 사람, 일들, 그리고 자신이 꿈꾸고 바라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나요?
무수히 맞닥뜨리는 여러 상황과 사건속에서, 나는 어떻게 그 상황과 사건에 대처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나요?
크게는 적극적인 태도와 소극적인 태도로 나눌수 있을 것입니다.
나서지도 물러서지는 않고 중립적인양 방임하는 태도도 있을 것이고, 회피하는 태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등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면 자신의 삶의 태도를 확인할수 있습니다.

착한사람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유순합니다. 실제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이 선합니다.
그래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속는 일이 많고, 동시에 손해도 많이 봅니다.
그러나 문제는 착한사람이 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너무 많이 희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울과 무력감의 늪에 스스로 빠져듭니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의미없는 것으로 만들고, 현재 상황을 비관합니다.
다시말해, 사람과 삶을 수용하는 것이 아닌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것이지요.

사람과 삶을 수용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이들을 바라보는 자신의 입장이 분명해야 합니다.
사람과 삶에 대한 분명한 태도가 있을때, 비로소 우리는 누군가를 수용할수 있습니다.
사람과 삶의 지향이 분명해야만 옳고 그름을 판단할수 있고, 그 옳고 그름이 분명해야만 자신의 한계를 알고,
벌어진 상황과 갈등 속에서 그것들을 수용할지 말지를, 그리고 수용한다면 얼마나 수용할수 있는지 그 수용량을 결정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을 분명히 아는 사람은 모든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거절할 줄 압니다.
이러한 주체적인 선택과 판단이 쌓일 때, 설혹 우리가 좌절을 경험할지라도 다시 일어설수 있는 것이지요.
이른바 회복탄력성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분명 아니다 싶고, 마음이 불편한데도 사람들과의 관계가 껄끄러지기 싫어서 그냥 받아들이는 것은 수용성이 아닌 수동성일 뿐입니다.

수용성과 수동성을 분명 다릅니다.
다를뿐만 아니라 그 결과 또한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수용은 기준 없는 순응이 아닙니다.
분명한 자신의 가치 기준과 삶의 지향이 분명할 때 우리는 주체적 선택이 가능하게 되고, 비로소 삶을 수용할수 있게 됩니다.
오늘 내 삶의 태도는 어떠했을까요?
수용적 태도였습니까?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내는 태도였습니까?

6월 2, 2026이음의 시선